마주하기/글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Arundhati 2017. 12. 13. 20:04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아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곳에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해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곳에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을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1990

황지우




재미있게도, 내가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는

약속 장소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었을 때였다.


왜 이렇게 빨리 왔냐는 물음에

책을 샀다고 대답했다.

물론, 책을 사기는 했다.

책을 사려고 한 것이 아니라,

기다리다가 책을 사게 된 것이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기억에 남는 시이다.
영화관에서
서점에 들러 산 시집을 읽으며,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며,
너를 기다리면서

때의 감정이, 감성이
느낌이
담겨 있는 시이다.

기다리고 있지만
애타지 않은.
다급하지도, 재촉하지도 않는
기다림 그 자체로도 행복한 기다림

그런 기다림을 모른다면
한 번쯤 권하고 싶다.
기다려보라고.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재촉하지 말기를

저마다의 속도가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