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부모님과 여름휴가로 중국 장가계를 다녀왔다.
장사 in, 장사 out이었는데 장사에서 장가계까지는 4~5시간 정도 이동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영화 몇 편을 미리 다운받아서 이동시간에 봤다.
그중의 한 편.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전에 한 번 보고서 두 번째로 보는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봤을 때도 신선하고, 몰입해서 봤었는데. 이번에도 여전히 그랬다.
난 잘 몰랐지만, 전에 봤을 때 인상이 깊었었나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번에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을까.
나한테 있어 좋은 영화는
언제봐도, 몇 번을 봐도 끝까지 볼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 내용 스포 **
영화는 223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1부와
663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2부로 나뉜다.
만우절에 여자친구에게 이별통보를 받은 경찰 223.
223은 그 '만우절 거짓말'이 곧 끝날 거라 믿으며 여자친구의 연락을 기다린다.
그가 여자친구의 연락을 기다리는 방법은 두 가지.
조깅. 그리고 1994년 5월 1일의 유통기한을 가진 파인애플 통조림을 구매하는 일.

조깅을 하는 이유에 대한 223의 말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명대사 중의 하나이다.
사람마다 실연을 할 때가 있다.
실연하면 난 조깅을 한다.
조깅을 하면 몸 속의 수분이 빠져나간다.
그러면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는다.
얼마 전, 출근길 버스에서 유명한 강연가인 김창옥님의 영상이 나와서 본 것이 생각난다.

한 방청객이 여자친구와 이별해서 너무 힘든데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는 질문을 하자
이별은 에스프레소에요.
너무 쓰면 물을 타고 되고, 덜 쓰게 마시세요.
그러나 감당할 수 있다면
그 쓴 맛을 한 번 온전히 느껴보세요.
그럼 또 알지 못하던 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냥 생각났다.
223이 1달의 시간 동안 이별을 겪는 과정은
마치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테이블 한편에 미뤄두는 모습처럼 보였다.
자신의 생일인 5월 1일에는 메이가 다시 연락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때까지가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메이가 가장 좋아하던 과일, 통조림을 사 모은다.
그리고 5월 1일.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현실에 마침내 이별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테이블 한편에 미뤄둔 에스프레소를 단 번에 들이켜는 것 같았다.
30개의 파인애플을 한 번에 먹어치우는 모습이 특히 그렇다.

이후 바에 가서는 처음 들어오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처음으로 들어온 여자가 바로 금발의 여인이다.
바가 닫을 때까지 함께 술을 마시다가
어딘가 쉬러 가자는 말에 함께 호텔로 가지만
정말 말 그대로의 의미의 '쉬러 가는 것'이었다.
여자가 잠든 사이에 223은
2편의 영화를 보고, 4개의 샐러드를 먹은 후 떠난다.
떠나기 전, 그녀의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넥타이로 닦아준다.
그리고 조깅을 한다.
조깅을 마치고 운동장을 떠날 때, 삐삐를 버리기로 다짐한다.
더 이상 연락올 일이 없으니까.
그러나 떠나는 순간 삐삐가 울리고,
223은 헐레벌떡 수신된 내용을 확인한다.
1부가 진행되는 동안 여러 번 나온
비밀번호는
"만년동안 사랑해"
삐삐의 내용은
702호 친구로부터
"생일 축하해"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이로부터의 연락이 아니라
어제 바에 들어온 순간부터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그렇지만 이어지지 못했고,
평생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여자에게서 받은 메시지.
그러나 223은 가슴을 움켜쥔다.
그리고 내레이션이 나온다.
한 여자가 생일을 축하해 줬다.
1994년 5월 1일에...
그 말 때문에 난 이 여자를 잊지 못할 것이다.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 있다면 유통기한이 없기를 바란다.
만일 유통기한을 정해야 한다면 만 년으로 해야지
如果記憶也是一個罐頭的話,
我希望這罐罐頭不會過期.
如果一定要加一個日子的話,
我希望它是一萬年.

메시지를 전달받은 후에
가슴을 움켜쥐고 앉아있는 223의 모습은
통조림 속에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것 같다.
만년의 유통기한을 가진 기억을.
스튜어디스 연인과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경찰 663.
그 이별에 대해 663은 이렇게 말한다.연료를 가득 채우고 나는 비행기처럼..
우리가 함께할 시간이 오래갈 줄 알았다.
비행기가 항로를 바꿀 줄은 몰랐다.

헤어진 연인은 663이 자주 방문하는 샐러드 가게,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 들러 편지를 맡긴다.
가게 사람들이 몰래 편지를 뜯어서 내용을 확인하는데
편지 속 내용도 둘의 사랑을 비행에 비유하고 있었다.
스케줄 바뀜.
당신의 좌석이 취소되어 열쇠를 돌려드립니다.
이별의 아픔에 며칠간 집에서 쉰 663.
오랜만에 가게에 방문한 그는 편지를 받지 않고,
당분간 보관해 달라고 부탁한다.
어쩌면 그는 희망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을 것 같다.
5월 1일까지의 유통기한을 가진 파인애플을 사던 223처럼.
663에게는 모든 것이 슬퍼 보인다.
얇은 비누도 야위어 보이고,
젖은 수건도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의 집에 페이가 몰래 들어간다.
집을 청소하고, 어행에 물고기를 채우고,
인형을 바꾸고, 깔끔한 옷을 채워 넣고.
전여친의 흔적을 지우려는 연인처럼...

그런 비밀스러운 방문이 계속되면 결국 들키기 마련.
집 안에 있는 그녀를 목격한 663.
집을 둘러보니 낯설다.
깔끔한 집도, 인형도, 비누도, 옷도, 걸레도.
슬픔에 잠겨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던 663이
고개를 둘러 주변을 보자 자신이 알던,
전여친과 함께하던 추억들은 이미 얼마 남지 않았다.
자신이 실연을 극복하고 평범하게 매일 살 수 있던 것이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바꾸어 놓던 페이 덕분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663은, 얼마 남지 않은 전여친의 흔적을 한켠에 치우고
페이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
하지만 페이는 편지 한 장만을 남긴 채 떠나버린다.
두 번째 실연의 아픔으로 편지를 버리지만...
곧바로 다시 편지를 주워 그 속에 담긴 페이의 메시지를 알게 된다.
1년 후, 경찰을 그만두고 페이가 일했던 단골 음식점을 인수받아 공사 중이던
663은 스튜어디스가 되어 돌아온 페이와 재회한다.
"승무원복을 입으니 예쁘네요"
"당신도 오늘 멋져요"
"이틀 후에 개업하는데 올래요?"
"내일 비행이 있어요"
"얼마나 걸리는데요?"
"이번엔 길어요"
"비행하는 동안 자주 편지 보내줄 수 있나요?"
"보내도 읽지 않을 거잖아요!"
...
"아참, 전에 주었던 편지 말이에요.
이런 티켓을 가지고도 비행기에 탈 수 있나요.
날짜는 오늘로 적혀있고, 장소는 몰라요"
"다시 한 장 줄게요. 목적지는 어디로 할까요?"
"아무 곳이나요. 당신이 좋은 곳으로"

작게 보면 223과 663, 두 명의 이별에 대한 이야기이고
크게 본다면 네 남녀의 사랑 이후의 이야기이다.
작중 끝까지 이름이 나오지 않는 금발의 여인과 페이도 각각의 이야기가 있다.
663과 페이의 이야기의 중심은 심지어 능동적(?)인 페이이기도 하다.
금발의 여인의 이야기도 궁금하다.
리처드와 어떠한 관계였을까.
리처드가 다른 여자에게 금발 가발을 쓰게 하고 관계를 하는 장면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연인이었을까. 그렇다면 왜 그녀를 배신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어떤 의미에서 정말 실연을 당한 게 맞겠다.
하는 생각들.
편지를 자주 써달라고 하니까
써줘도 읽지도 않을 거라고 퉁명스레 대답하는 페이를 보면,
비로 지워진 편지의 목적지는 캘리포니아가 아니었을까.
1년 전 약속했던 그 가게에서
페이는 기다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 전 그날처럼 내리를 비를 바라보며...
여러 해석과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이별을 받아들이는 223과 663의 모습에 많이 눈길이 갔다.
223은 만년이라는 유통기한으로 가슴속에 담아둔다.
담아두는 마음이 여자친구에 대한 마음이 아니라,
생일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낸 702호 친구에 대한 마음이지만
그 담아둠으로 인해 이별에서 일어나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663은 치워둔다.
남은 짐을 상자에 넣어 집구석에 보관하는 장면은
언뜻, 통조림에 기억을 담는 것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 행동에는 223과 달리 울림이 없어 보인다.
그냥 정말...때지난 옷을 치우는 것처럼
치워버린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사랑했기 때문에
이별에 아파할 수 있고.
사랑했기 때문에
또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 같다.
223과 663 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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